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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나누곤 했다. 엄지를 맞대 도장을 찍고 손바닥을 스치며 ‘복사’를 하고 손등을 맞대 ‘코팅’까지 마치면 비로소 약속은 완성된다. 그 짧은 행위 속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과 함께 서로를 향한 신뢰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걸다’라는 표현에는 흥미로운 이중성이 있다. 옷을 옷걸이에 ‘거는’ 가벼운 행위와, 목숨을 ‘건다’는 무거운 결단이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 약속 역시 그렇다. 사소해 보이는 말 한마디일지라도 그 안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과 신뢰가 함께 실려 있다.
이러한 약속의 의미는 문화권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중요한 협상이나 계약을 체결할 때 새끼손가락을 거는 관습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핑키 스웨어(Pinky Swear)’라는 이름으로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약속의 신뢰를 강조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의 ‘유비키리(指切り)’는 문자 그대로 ‘손가락을 자른다’는 뜻을 지니며 약속을 어길 경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극단적인 맹세를 담고 있다.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약속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약속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듯하다. 특히 지방선거를 앞둔 지역사회에서는 수많은 약속들이 쏟아진다. 후보자들은 유권자 앞에서 다양한 공약을 제시하며 신뢰를 호소한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거나 약속을 뒤로 미루는 모습 또한 낯설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행태가 단순히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공적인 약속이 가볍게 취급될수록 사회 전반의 신뢰 기반 역시 함께 흔들리게 된다. 약속은 단순한 발언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과 신뢰를 타인에게 내어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볍게 여기는 순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신뢰 구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종종 ‘작은 약속’과 ‘큰 약속’을 구분한다. 일상의 사소한 약속은 쉽게 미뤄도 된다고 여기고 중요한 약속만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뢰는 크고 작은 구분 속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약속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한 사람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작은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에서 큰 약속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약속은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켜짐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개인의 신뢰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기반을 형성한다. 신뢰에 경중이 없듯 약속에도 크고 작음은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약속이 아니라 이미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태도일 것이다